Cathy Yi
Interview by Lauren Cho, Benjamin Yoo, and Da In Choi
이것은 대략 정리된 내용입니다.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1950년,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 태어난 곳은 경기도. 경기도면 서울 캐피털에서 한 삼십분 떨어진. 거기서 태어났고, 어렸을 적에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미국에 와서, 이제 내쉬빌 에 있는 테네시 대학교에서 좀 다니면서, 여러 가지로다가 힘든 면도 있고 그래서 워크 앤 스테이하면서 조금 공부를 했는데, 그냥 하다가 허성생활만 했어요… 몇 년을… 네… 그래갖고 이제 뭐 하고, 그리고 사회에서 사회생활 조금 하다가 그것도 적응이 안 돼갖고 일을 안 해봤어요. 처녀 때도요. 그래서 처녀 때 일한 거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 워크 앤 스테이 조금 하는 거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살다가 그니까는 80, 그니까 1980, 80이 아니지… 언제야..? 내가 27살 때 결혼해서 31에 우리 큰아들을 낳았어요. 그러니까 아들이 지금 마흔 한살이고 그러고 나서 또 이제 연년생 아시죠? 딸을 낳았어요. 딸이 지금은 마흔. 걔는 지금 결혼을 해서 뉴욕에 살고 있어요. 뉴저지. 그리고 우리 아들은 여기서 살고 있고 그렇습니다. 예 그러다가 이제 뭐 나름대로 이제 나이가 있고 하니까는 남의 인제 회사에서도 일 조금 했고. 리테일 스토어에서도 조금 일을 했고 그러다가 저는 리타이어를 지금 한 지가 16년 됐어요. 그때부터 일 전혀 안 하고 그냥 집에서 놀고. 그리고 이제는 노인 아파트, 시니어하우스에 들어가서 지금 산 지가 8년 됐어요. 네, 그렇게 더 할 게 없겠죠? 먹고 자고 놀고 그러고 있어요…
이민을 대학교를 오기 위해서 하신거에요?
대학교를 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이 있어서, 왔다가 이제 뭐 그때 나이가 어리니까 공부 좀 해보라 해갖고 했는데, 그때 뭐 아시다시피 영어도 못하고. 이제 미국의 생활에 적응도 못 했을 때고. 당시에는 굉장히… 뭐 당시 때만 해도 흑인이나 아시안계는 인간 취급을 안 했어요. 그냥 다니면, 마켓 같은 데 가면은 쫓아다니면서, 그냥 눈 찢기 하면서, 쳐다보면 이제, 특히 어린 아이들이 자기 부모한테 뛰어가서 울고, 내가 무슨 해코지 한 것처럼, 응? 그때였어요… 네, 그래도 뭐 이런 얘기는 미리 한국에서 들어오기전에, 이제 많이 차별을 받을 거라 했기 때문에 신경은 써지지만 그걸 갖다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던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다고 해서 뭐 나무랄 수도 없는 거고, 뭐 왜 그러냐 그런 걸 못 하니까 꾹꾹 참고 마음은 아프지만 그래 내가 이 나라에서 사러 갈 거니까 참자… 그러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여기 온지는 지금 50년 됐어요. 50년 돼서도 이제 한국 사회에서 살다 보고 하니까 영어도 잘 못하고. 우리 아이들은 여기서 다, 큰애 작은애 다 뉴욕에서 태어났어요. 같은 병원에서. 걔네들하고도 말이 잘 안 통해요. 우리 딸하고는 그래도 조금 한 70%는 통하고. 우리 아들하고는 한 40프로밖에 안 통해요. 못하는 영어지만 뭐 우리 아들은 엄마 잘해, 그러는데 저는 못하거든요. 그렇게 인제 나이도 많으니까 별 신경 안 써요. 하지만 제가 항상 모르는 거는 TV 보면서, 거짓말 아니에요. 항상 테레비 보고 단어를 모르면 그걸 빨리 누워서라도 그냥 아무렇게나 적어놔요. 그래가지고 이제 나중에 일어나서 그걸 다시 수정하고. 예를 들어서 아침 하면 거의 이제 아침하고 옆에다가 투모로우 이렇게 써 놓고. 그래서 인제 예를 들어서 단어를 모를 때, 이게 뭔가? 그러면 인제 노트를 열어서 봐요. 한국말이 쭉 이렇게 가나다로 해서 써놨으니까, 그러면 인제 그게 이렇구나. 그래도 금방 잊어버려요. 금방.
한인타운에서 지금 인종차별이 더 심해진 것 같나요? 아니면 조금 나아진 것 같나요?
저는 여기서 안 살았어요. 테네시 에서 살았어요. 거기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거기다가 교육지대예요. 거기는 진짜 심했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도 차별을 받으면서, 우리 역시 흑인을 차별을 했어요. 그래 이제 집에 청소를 하러 오면은, 이제 한 달에 한 번씩 수표를 써줘요. 그러면은 인제 수표를 써주면은 밖에 차고에 이렇게 들어오는데 거기다가 쓰레기통, 깡통으로 된 거 있죠. 그걸 갖다가, 뚜껑에다가 수표를 딱 붙여놔요. 테이프 해서. 그러면 들어오지 못하고 청소하기 전에는 못 들어와요. 그러면 거기서 뛰어가는 거예요. 이정도로 차별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들도 마켓을 가잖아. 그러니까 이제, 우리 식구들하고 마켓을 가면은 이제 백인, 아이들이 특히 쫓아와요. 쫓아다니면서 흉내 내고. 눈 찢어졌다 이렇게 하고. 이제, 그러면은 쳐다보면은 말은 못하고 제대로 통하지도 않으니까, 말을 못하고 이렇게 쳐다보면은 뛰어가서 자기 엄마나 아빠한테 가서 울어요. 제가 때린 것처럼. 그러면 이제 또 거기서 손짓 발짓 다 해 가면서 다 설명 하는 거예요. 그때는 70년대니까…
뉴욕에서도 사셨다고 했는데 테네시에서 언제 뉴욕으로 가셨나요?
그건 정확하게 모르겠네요. 이제 잊어버려 갖고. 테네시에서 좀 살다가 뉴욕에서 우리가 살면서 결혼을 했죠. 그래서 장사를 했는데, 뉴욕에서는 렌트비도 비싸요, 당시에도. 우리는 그래서 뉴욕에서 5년을 살다가 뉴저지에 가서 살면서, 필라델피아가 거기서 가깝거든요. 거기서 장사를 했어요. 아이들 아빠는 아이들 아빠 대로 하고 나는 나대로 하고. 예 그런데 이제 나는 조그만한 가게를 하면서 이탈리안 타운, 필라델피아에서, 경쟁해요. 이탈리안타운 안에 들어갔던 게 제 실수였어요. 여기는 동양 사람을 이태리 사람들이 굉장히 무시했어요. 그리고 거기다가, 마피아들의 타운이었어요. 그러니까 장사를 못하게 자꾸 방해를 하고. 그래가지고 저는 무서워서 그만두고. 이제 아이들 아빠는 이제 우리가 살던 데서 조그만 다리 하나만 건너면은 체리힐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살면서 장사하고. 그러다가 여기 LA로 온 지가 86년도에 여기 왔어요. LA로다가.
LA에 와서도 계속 차별을 받았나요?
엘에이는, 저는, 그런 걸 못 느꼈어요. 네, 그래가지고 여기 웨스턴 스트리트 거기에서 도매상을 했어요. 우리가 도매상을 해갖고 그때는 뭐 경기들이 좋았잖아요. 당시에는 너무 좋았어요. 진짜로 그래가지고 그냥, 이제 막말 로다가, 그전까지는 좀 위축돼 가지고 좀 그랬는데. 그게 마냥 그런 게 아니더라구요. 예, 그렇게 살다가 이제 또 다 정리하고 아이들도 그때 국민학교들 다니고 그래갖고, 이제 다 정리하고. 나는 이제 남의 집에 가서 리테일 스토어에 가갖고 일하면서 매니저를 갖다 10년을 했어요. 한 집에서. 멜로즈, 멜로즈 에비뉴 에 가서. 멜로즈 하고 포인세티아 라는 데가 있어요. 거기서 일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이제 또 저기 리틀 도쿄, 거기서 이제 조금 하다가 여러 가지로 조금 그런 게 있어서 다 정리하고 제가 여기 타주를 갔었어요. 여기가 싫더라고요. 이상하게 내가 큰 아픔을 당하다 보니까, 코사인도 몇 사람 다 아는 사람한테 너무너무 잘 아는 사람한테 코사인을 해주고 그러다가, 이제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앉은 거죠. 제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딴 데로다가 다 이제 도망을 갔고 피해가 다 저한테로 온 거예요. 그래갖고 그때서부터 인제 남의 집에, 리테일 스토어 경험이 있으니까, 일을 하고. 그러다가, 에휴, 관두자. 그냥 이 남의 집에 일하면은 그게 있잖아요. 눈치. 장사가 잘 되면 신나는데 장사가 안 되면 주인도 스트레스, 일하는 사람도 스트레스. 그러니까 그게 조금 그래서 그만뒀습니다. 그래서 지금 리타이어을 한 지가 16년 정도 됐어요. 그동안 놀았어요. 그러니까 들어오는 수입은 없고 그러니까, 지금 시니어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그게 다 입니다.
같이 일한 사람들도 한국인이었나요?
아니 외국 사람이죠. 외국 사람들 스패니쉬도 있었고, 한국 사람들도 조금 있었어. 내 밑으로 일하는 학생들 고등학생도 있었고, 대학생도 있었고, 다 이제 외국 사람이고. 손님은 다 외국 사람이었어요. 그때 연예인들도 참 많이 왔어요. 니콜라스 케이지 와이프 있죠, 한국인, 제가 잘 알아요. 니콜라스 케이지도 왔고. 뭐 당시에 그 외국 사람들한테 어울리는 일을 했기 때문에, 외국 사람 손님이었어요 거진 다가 90프로. 근데 도둑도 많이 맞고.
한인 타운에서요?
아니요. 멜로즈. 한인타운에서는 안 했어요. 멜로즈하고 할리우드.
LA에서 살면서 이제 특히 한국인과 흑인들의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나쁜 경우가 되게 많아잖아요…
네, 저는 오래전부터 한국집에 제가 한 6개월이 있었어요. 그때가 그 여자 옷가게 있는데, 그때 저기 아시안 마켓 2층에 있었고, 그러는데, 이런 소리를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집에서 일한다는 것 좀처럼 쉬운 일 아네요. 한국 사람들은 나이 상관없고, 뭐가 경험이 상관없어요. 그냥 무조건 주인이면은 야자예요. 너 이거 해. 야 저거 해. 외국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해요. 해도 그게 기분이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진짜 기분 나쁘게 해요. 그래서 저는 될 수 있으면 한국 집은 피하고, 외국 사람 상대가 편했어요.
코로나 때문에 여기 LA가 좀 더 위험하다고 느끼셨나요?
네, 위험해. 제가요 이거 리포트도 하고 티비에도 나왔었어요. 로컬 뉴스에 나왔는데 제가 맞았어요. 저기 홈레스한테. 우리 친구하고 같이 웨스턴, 이제 가주마켓 아시죠? 거기서 수다 피면서 걸어가는데 느닷없이 우리 가운데를 파고들면서 우리 친구를 이걸로 팔을 뒤로 치고 나는 여기를 맞아서, 남의 집 상점 벽에 박았어요. 그래서 여기가 아팠고, 경찰이 리포트 했어요. 경찰이 리포트하니까 한 두 시간 있다가 와서, 나는 안 하고 싶었는데, 리포트를 해야 된다. 경찰이 그러더라고요. 그래야지 이걸 알림으로써 더 많이들 조심들 하고, 계속 리포트해서 그게 로컬 뉴스 나오더라고요. 네, 맞았었어요. 그러고 나서 이제는 마켓이나, 또 뭐 아시겠지만, 우리가 한 달에 한 번씩 은행에 또 돈 찾으러 가잖아요. 그럼 섬찟섬찟해요. 네, 뒤돌아보게 되고 조금만 무슨 소리나면. 지금 우리 사는데 거기, H마트 갈려면 홈레스들이 텐트들 있고 소리 지르고 난리예요. 지금도 그러면 진짜 무서워요. 진짜 이거를 무슨 시에서 조치를 취해야지 이러다가는 안 돼요. 뭐 아시잖아요? 얼마나 밀고 때리고 스태빙하고 총으로 쏘고… 광장히 무서워요. 가끔은 혼자 이렇게 그냥 있으면, 이젠 미국도 갔구나… 좋은 시대는 갔고,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면서 살아야 될까? 하는 그럴 때가 있어요. 뭐 LA뿐만 아니에요. 우리 딸한테 제가 8월 달에 갔다 왔거든요. 거기는 물론 맨하탄에 가면은 뉴욕, 맨하탄에 가면 말도 못 해요. 여기보다 더해요, 홈레스들이. 그렇지만 우리 딸 사는 뉴저지만 해도 찾아볼래 찾아볼 수가 없어요. 거기는요 진짜 너무 좋아요. 여기는 너무 더럽고 홈레이스들 너무 많고 지금. 뭐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같이 살아야지.
코로나 때문에 경제 상태가 나빠지면서 더 심해졌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럼요. 그건 당연하죠. 그건 뭐 누구나 다 느끼는 거니까. 어떡하겠어요. 나 하나뿐만이 아닌데. 나 혼자가 아니잖아요. 지금 온 세계가 다 힘든 생활을 하니까, 그냥 어쩔 수 없어요. 정말 힘들어요. 저는 항상 그래요. 나만 해도 이제 많이 살았으니까 좀 이렇게 살다가 저거 하지만, 젊은 분들이 너무 불쌍한 거예요, 앞으로. 지금 큰 회사들은 다들 직원도 감안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도 이런데 앞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나… 그 생각밖에 안 들어요. 왜 우리 아들도 젊고, 아직은 우리 딸도 젊지만 그래도 걔네들만 있는거는 아니잖아요. 여러 젊은 분들이 너무 안 된 거예요. 제가 생각할 적에는 우리야 지금은 막말로다가 한 달에 적든 많든 딱딱 나오죠. 뭐 렌트비는 많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렌트비 내고 신경없이 살잖아요. 신경 안 쓰고. 하지만 젊은 분 분들이 아파트비 자꾸 올라가죠, 물가 올라가죠 회사에서는 자꾸 짜르죠, 젊은 분들이 불쌍한 거예요. 지금 정말이에요.
인종 차별을 받으면서 한국을 떠난 걸 후회하게 되나요?
후회는 해보지가 않았어요. 어려서 왔으니까, 먹는 게 우선은 풍부했잖아요. 뭐 과일들이나. 그러니까 너무 좋더라구요. 너무 좋고, 내 맘대로 행동하고. 제가 이제 처녀 때 미니스커트를 이렇게 입었어요. 이렇게 입고 나가면 그냥 순경들이 방망이 갖고 다니면서 이 다리를 허벅다리를 탁탁 치고 그랬어요. 너무 짧다고. 그랬는데 여기 와서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배꼽티를 입어도 누가 신경 안 쓰고. 뭐 하긴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여기 와서도 그때든 매듬 같은 건 하질 않았어요. 그때는 이제 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젊었으니까 피부도 고왔고, 이제 뭐 남들이 봐줄 만했으니까 그냥 자신만만하고. 뭐 다만 그냥 말을 못 하고 그게 안 통하니까 조금 속상했을 뿐이지, 뭐 후회하고 그러진 않아요. 저도 뭐 한국 나가도 오히려 한국은 거 재밌어요. 먹는 거 하고 맛있고 그런데, 한국 가서 2주 있으니까 오고 싶더라고요. 오고 싶어요. 내가 나가 살라 그러면 나가 살았어요. 그런데 가서 2주만 있으면 벌써 오고 싶어요. 지금 팬데믹 때문에 더 이렇게 험악하지, 팬데믹 오기 전에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매일같이 그냥 뭐 쇼핑을 꼭 해서가 아니라 심심하면 그냥 버스 타고 베벌리 커넥션에도 가서 시간 때우고 오고. 좋았어요. 근데 지금 팬더믹도 있고 험악하니까 버스도 못 타고 다니고, 무서우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죠, 후회한 건 없어요.
이제 코로나 때문에 상황이 많이 나빠지셨다고 이제 하셨잖아요. 그래서 이제 정부가 이제 해결책을 해야 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 정부에서도 지금 많이 노력을 하잖아요. 애쓰고 있잖아요. 그러니까는 제가 뭐 이렇게 저렇게 그런 저기 할 입장은 못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볼 적에는 굉장히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냥 한참 심했을 적에는 주 정부에서도 그렇고 연방전원소에서도 조금이라도 보태주려고 했고 지금도 애는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데 지금은 문제는 이 홈레스들만 해결해 주면 사람이 그래도 마음 편히 길을 갈 수 있지 않은가 생각이에요.
한인타운에서 그래도 이제 좀 안 좋은 경험에 대해서 얘기를 하셨잖아요.
한인타운에요. 저도 한국 사람인데 한국, 특히 식당을 하시는 옷가게를 하시는 분들이 조금 좀 심하다 그런 건 제가 느껴요. 제가 뭐 아시다시피 제가 제 입장에서는 제가 어디 파티를 가서 뭐 드레스를 사 입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집에서 그냥 캐주얼하게 사는데, 정말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로스 티제이 맥스 마셜 뭐 노스트롬 같은 데 가면은 저렴한 가격에 얼마든지 사 입어요. 근데 한인타운에서 너무 올리는 거예요. 올리고 비교를 하면은, 내가 한 번은 웨스턴 백화점에서 봄가을에 세일을 해요. 대세일을 해요. 세일을 하면 가격을 이렇게 올려놓고 이렇게 반가격이다 하고. 나 거기서 정말… 그리고 지금도 보세요. 식당들 지금. 이것도 이해는 하죠. 왜? 모든 물가가 올라가니까. 그분들도 힘들죠. 그러니까 올릴 수밖에 없지만, 너무 지나쳐요. 지금 너무 지나쳐요. 내가 지난번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친구하고 그게 11불 99전이 였었어요. 1년 전만 해도. 1년 전도 안 돼요. 지금 그런데 지금 그게 얼마인지 아세요? 22불이에요. 22불. 그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그게 한두 집이 아니에요. 그리고 옷가게도 이게 이제 겨울에 입는 거 이렇게 극세사 같은 거, 잠옷 한 벌에 뭐 19불 99전. 따뜻하고 좋아요. 집에서 잠옷을 입는데. 지금은 그런 게 30불이 넘어요. 물론 통감비도 있지만, 그렇게 팔던걸 1년도 안 됐어요. 너무 그러니까 참… 한국집에 가서는 쇼핑하고 싶지 않아요. 안 하고 싶어요. 뭐 한국 사람들 한국 비즈니스를 도와서 좀 이렇게 저거 하자 한인타운을 성장하기를, 노. 우리 친구들도 똑같은 마음이에요. 너무 바가지예요. 너무 그러니까 한국타운에서 쇼핑하고 싶지는 않아요. 단 한 가지는 우리 체형이 맞으니까 하는 거지, 외에는 안 사 입어요. 안 하고 싶어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한인타운에서 좋아하는 장소나 좋아하는 것이 있나요?
한인타운에서 좋아하는 건 없어요. 저는 친구들 만나면 그렌델 아메리카노 거기 가서 아이 쇼핑하고 뭐 치즈케익 펙터리리 같은 데 가서 간단하게 밥 먹고 그러고 오고. 또 아니면 그냥 좀 뭐 배블리 커넥션은 제가 말씀드린 그쪽에 갔다 또 그쪽에서 길 나가면 또 베블리 쇼핑센터 잖아요. 그런데는 얼마나 재미있어요. 한인타운에서 놀 데 없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이제 여기서 이민자로 사는 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의미라는 것보다는 뭐 제 입장에서는 한 번 그래도 미국에서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 그것밖에 없어요. 뭐 딴 의미라는 거 없어요. 그냥 아마 대부분이 그러실 거예요. 아메리칸 드림 갖고 왔다고 그러는데 잘 살려고 그러는 거죠. 한마디로 잘 살아 참 한번 잘살아 보라고 제가 올 때만 해도 우리나라 못 살았잖아요. 그때 정말 못 살았어요. 그러니까 미국 와서 한번 넓은 데서 한번 잘 살아보자. 모든 것이 그때만 해도 다 풍족했으니까 한국에 비하면. 한번 잘 살아보자 여기서 열심히만 하면은 아마 잘 살 수 있겠다. 한때 잘 살았어요. 정말로 한때는 정말 잘 살았지만 다 필요 없더라고요. 그게 이제 와서 저는 제가 말하는 게 항상 거꾸로 살았다. 이거예요. 나이 들어서 잘 살았어야 되는데 젊어서 잘 사는 거예요. 지금은 이러고 사는데… 제가 잘못 생각을 했기 때문에 어렸을적에는 나 잘벌겠지 나는 늙지 않겠지, 그게 낭패였던 거예요. 이제 돈들 벌으시면 조금이라도, 백불 벌면 20불이라도 통장에 넣으시고 사세요. 그냥 만약 나는 항상 젊어 나는 마냥 벌겠지 하면 안되요.
미국에선 이 쫌 그런 식이잖아요. 나이 드신 분들이 이제 좀 노인정 같은 곳에 살잖아요. 근데 이제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부모를 모시고 사시잖아요.
여기서는 그런 거 바라면 안 돼요. 이젠 한국에도 뭐 드라마나 얘기 들어보면은 절대 그런 거 없대요. 너는 너 나는 나. 아무리 나를 낳아준 부모라도 너는 너 나는 나. 오히려 부모들이 조금이라도 뭐가 경제적으로 괜찮다면 자식들이 돈 때문에 부모 죽이고 돈 뺏어가는 그런 것밖에 없잖아요. 특히 여기는 더하죠. 너는 너 잘 살면 돼, 나한테 바라지도 말고 나도 너한테 바라면 안 돼. 그거는 만약에 내가 자식을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자식한테 지네들이 그냥 엄마 아빠 용돈 쓰세요 하고 주면은 그때는 받아요. 하지만 아무리 잘살아도 자식한테 바라는 건 그거는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오히려 내가 조금이라도 이렇게 있으면은 자식 걱정을 하지 그건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노인 아파트에서 사는 경험은 어떤가요?
처음에 들어가서는 3개월을 울었어요. 그리고 저가 사는 아파트는 어떻게 되냐면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러면 5층까지 있어요. 그러면 5층에서 1층까지 제일 끝에 빵만이 방 하나짜리고 외에는 다 그냥 싱글이에요. 그러니까 부엌도 여기 세 발짝 걸으면 부엌 세 발짝이는 화장실이에요. 3개월을 울었어요. 3개월을 블라인드를 딱 아침에 일어나면 저는 이제 뷰는 좋아요. 할리우드 천문대하고 할리우드 사인이 다 보여요. 또 밤에는 또 아주 그냥 불빛들이. 그건 아름다운데 야 이거는 완전히 거기 들어가면 죽어야지 나가는 거예요. 죽어야지 그리고 정말 새장. 새장에서 사는 거랑 똑같았어요. 왜 아무리 저라해도 그런 방에서 안 살아봤으니까. 저 3개월을 울었어요. 3개월을. 그리고 때에 따라서 조금 무서운 생각도 들었어요. 여기는 여기서는 죽어야지만 나가는구나…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일반 아파트에서 살 수 있죠. 그런데 그게 아니니까… 그냥 이제 새장에서 이렇게 허생생활로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 그런 게 그냥 복합적인 생각이 오니까 3개월을 울고. 그냥 제대로 잠도 못 자고. 그냥 그랬어요. 우리 친구들도 처음에 보러 왔는데, 한번씩 밖에 안 왔어요. 답답해서. 그러니까 밖에서만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제 나름대로 조금 좀 비참하겠어요. 그러니까 눈물밖에 안 나오지 정말로… 그랬답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이 고등학생들이랑 같이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제 삶의 조언을 주고 싶다면은 어떠한 것을 주고 싶으세요?
그러니깐 저도 이제 부모 입장에서는 착하고 또 열심히 공부 잘해서 뭐 그게 나중에 뭐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공부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서 다 좋은 데 가고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다 보면은 그래도 안 한 사람보다는 조금 낫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선 열심히 하고. 또 커서 좋은데 돈 벌면서 또 이제 잘 헤쳐나갔으면. 뭐 부모 말 잘 들어라 그런 건 안 해요. 그거 바라면 안 돼요. 그거는 그것도, 응? 다 나름대로. 우리 아들이 나한테 그러지 내가 뭐라그러면 “Mom, I wasn't born yesterday. I’m 41 now.” 이래요. 할 말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거 같애 그냥 열심히 그냥 하다 보면은 그래도 안 한 사람보다는 많은 걸 더 얻을 것 같지 않나 해서… 열심히 공부 잘하고, 응? 나쁜 거 안 하고, 응? 그거예요. 딴 거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