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by Jane Lee, Christine Paek, and Daisy Yeon
성함, 나이, 태어난 곳를 말씀해주세요?
제 이름은 유라나 입니다. 1952년 3월 14일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것은 대구에서 태어났어요. 네 이민 1세입니다. 1976년도에 LA로 이민을 왔어요. 저희 가족은 오빠 한 분 언니 둘 그리고 나 그니까는 일 남 삼 녀 중에 제가 막내입니다. 부모님은 아버님은 이민 오기 전에 돌아가셨고요. 어머님과 함께 이민을 왔어요.
어렸을 때 꿈, 희망, 장래희망이 무엇이었나요?
어렸을 때는… 제가 노래를 참 잘해요. 그래서 어쩌면 가수가 꿈이었던 것 같아요. 어려서 제 내가 이제 전쟁 중에 태어났거든요. 우리가 한국 전쟁 중에.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이 다 대구로 피난을 가셨어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내가 태어났어요. 그리고 다시 5살 때 서울로 와서 자라게 됐어요. 그때는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굉장히 힘든 상태였어요. 저희 부모님한테 그래서 제가 내 꿈이 무엇이라고 어렸을 때 말해준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한 번도 내가 나만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인형이 없었거든요. 근데 이제 노래를 좋아했고 노래를 또 잘했어요. 그래서 늘 손님이 오면 나서서 노래로 화답을 하고 자랑을 하고 그랬었지요. 어쩌면 가수였을지도 몰라요, 제 꿈은.
자신의 인종이 뭔지 말해주세요?
23살때 이민 왔거든요. 그래서 나는 항상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무엇을 전공하셨나요?
네 제가 전공이라고 한 것은 대학교 때를 말하나요? 대학을 다니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공은 뭐 특별히 없지만, 암 이제 항상 노래는 늘 했었고요. 그다음에 내가 뭐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와서 이민을 와서 23살 때 이민 와서, 25에 여기서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많은 경험을 했어요. 은행에서도 일을 했고 또 시청 여기 엘레이 시청에서 일을 했었고 또 이제 비즈니스를 하고 싶어서 여자 옷 가게도 했었고. 뭐죠 이 드라이클리너도 했었고. 가발샵도 했었고 .많은 우리 한인들 이민 오신 한인분들이 할 수 있는 또 좋아했던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리타이어 한 거는 저기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을 23년 일하다가 리타이어 했어요. 많지요?
라스베가스 카지노 딜러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이제 돈 하고 관련이 돼 있잖아요.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을 만나요. 뭐 하루에도 정말 수십 명에서 거의 100명 가까이, 뉴페이스를 늘 만나잖아요. 그러니깐 이 사람은 이 사람 팁을 잘 주겠다. 안 주겠다. 금방 알게 됐어요. 게임은 투원티원, 블랙잭, 룰렛, 많이 일 했어요 . 저는 저기 실버톤 이라는 카지노에서 일 했어요.
힘든점과 좋은점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나요?
그러면 힘든 거부터 얘기할게요. 힘든 거는 딜러라는 직업은 기능직 일이에요. 늘 똑같은 일. 어떤 내 개발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굉장히 지루해요. 그리고 담배 연기. 이런거 때문에 무척 힘들어 했어요. 일하기가 그리고 시간 같은 것도, 3분만 늦어도, 체크를 다 해야 돼요. 왜냐하면, 세 교대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세 교대로 나누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를 교대를 해줘야 사람이 퇴근을 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늦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와, 이렇게 사람으로 실수 또 실수하면 안 되고. 돈이 그게 연관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일들이 좀 힘들었고. 또 제가 싫어했던 일이었고. 그다음에 좋았던 일은 많은 사람을 만나요. 정말로 각 온 세계에서 온 사람.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참 흥미롭고 또 그런 건 재밌어요. 시간이 금방 가요.
코리아타운에서 사신지 얼마 됐나요?
한국 여기 코리아 타운은 이민 와서 17년간 살다가 라스베가스로 이사 가갖고. 거기서 살다가 리타이어 하고 5년 전에 다시 왔어요.
코리아타운이 살기 좋은데라고 생각하시나요?
좋지요. 여기 마켓도 레스토랑, 아이고 먹을게 얼마나 좋아요. 여기 마켓, 한국마켓 귀가 막히 잖아요. 그리고 또 크게 봐서는 LA 캘리포니아 날씨, 여기 살 땐 몰랐어요, 이렇게 좋은지를/ 그런데 한번 제가 타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오니까 와 여기가 천국 같애요. 너무 좋아요. 그리고 리타이어 하고 나니까 또 저희들한테 주는 베네핏도 타주보다 훨씬 좋아요. 그래서 굉장히 만족하고 행복하고.
코리아타운에서 기억에 남는 중요한 추억은 무엇인가요?
한국, 역시, 우리 한인끼리의 어떤 릴레이션십을 가질 수 있는 거. 우리만의 문화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참 좋아요. 그리고 많은 우리 한인들이 계시기 때문에. 또 좋은 분들을 너무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거. 굉장히 흥분되고 좋은 일인 것 같애요.
코리아타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뭐야?
장소요? 제가 살고 있는 파사데나입니다. 잠깐만 코리아타운에서요? 코리아타운에서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갤러리아 마켓. 이 층에 가서 또 밥도 먹고 마켓도 가고 또 쇼핑도 하고 거기가 좋아요.
얘기하신 대로 되게 젊을 때, 23살에 미국으로 오셨고 그리고 25살에 결혼하셨잖아요. 그거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들어가고 싶은데. 혹시 처음에 왔을때 어떠셨나요? 뭘 배웠고 뭐가 제일 힘들고?
제일 어려웠던 면은 역시 언어 였겠죠. 언어고. 또 그다음에 좋았던 거는, 저는 정말로 행운이였떤게, 저희 언니 둘이랑, 그리고 어머니 나의 친정어머니랑 다 왔어요. 한꺼번에 같이 이민을. 그래서 굉장히 식구들이 많아서 굉장히 뭐 외롭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늘 집에서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또 뭐 교회도 같이 다니고 모든 게. 이 그래서 저기 좋았어요. 미국이라는 데를 왔을 때 좋았던 면은… 그당시에 한국이 지금하고 달랐죠. 취직하기도 힘들었고 특별히 나처럼 어떤 전공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미국 와서는 기회가 너무 많았어요. 할 수 있는 일도 많았고. 또 내가 한국인으로서 타인종들과 같이 이렇게 일을 하고 경쟁을 하고 이런 게 참 좋더라구요. 대답이 됐나요?
코리아타운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도시 중 한 곳에 위치한 다문화 공간이잖아요. 코리아타운이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위한 포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지?
성소수자 나한테는 굉장히 반가운 단어예요. 우리 아들이 한 15년 전에 커밍아웃을 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저희 아들은 40살이고. 했을 때 제 반응이 궁금하시죠? 어땠을까? 처음엔 놀랐어요. 왜 우리 아들이 이렇게 힘든. 굉장히 힘들게 생각을 했거든요. 성소수자들의 라이프가 왜냐면, 많은 차별이 있고 불공평하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 아들이 왜 그런 힘든 라이프를 가져야 되나에 대해서 굉장히 내가 속상했어요. 그리고 내가 뭐 잘못 키웠나? 또 내가 아이를 너무, 이렇게 정말 질문이 너무 많았어요. 왜 왜 왜? 아들이 하는 얘기가 나는 엄마가 벌써 알고 있을 줄 알았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랬는데 얘기 듣고 그것이 충격적이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우리의 아이들과 아들과 굉장히 가깝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곤 나는 정말 아주 쿨한 엄마라고 생각을 했거든. 근데 내가 우리 아들을 몰랐었대니… 그 아들이 내가 우리 아들을 본체로 볼 수 없었다는 엄마였다는 게 굉장히 부끄러웠고. 지금 좀 눈물이 날라 그래… 응… 그래서 부끄러웠고 미안했어요… 또 한편은 내가 카지노에서 일했을때 늘 오던 한 커플이 있었어요. 케이 커플이에요. 근데 친구들은 정말 너무 멋쟁이고, 팁도 참 잘 주고, 젠틀하고 험블하고 내가 무척 좋아했어요. 젊은 친구들인데 우리 아들 나이였지요. 그니깐 우리 아이 아들의 이름은 일라이예요. 일라이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 물론 그렇게 힘든 라이프를 가지면 어쩌나 하는 그런 어려운 생각도 있었지만/ 또 한편은 내가 만난 그 커플처럼 멋있는 애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내가 마음이 조금 오픈되더라구요. 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떤 상태래든 내 아이 나의 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건 변함이 없잖아요. 그러니깐 또 우린 가족이고. 내가 아이의 엄마가 된 이유가 있을 거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많이 힘들지 않았어요. 솔직히.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까?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 아들이 공평하게 무시 안 당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 이 세상을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나머지 가족, 주변인들은 어떻게 반응 했나요?
얘기하자면 아마 몇 시간이 걸릴 텐데… 처음에 일라이가 커밍아웃을 했을때, 나한테는 딸이, 일라이보다 5살 위인 딸이 있어요. 딸과 그리고 라나와 그리고 일라인데 일라이한텐 누나죠. 누나한테는 이미 한 5년 전에 이미 커밍아웃을 했었더라고요. 그리고 나한테 이제 맨 마지막에 커밍아웃을 했어요. 힘들었었나 봐요. 나한테 커밍아웃 하기가. 그때는 이제 우리 어머니가 90살에 돌아가셨거든요. 돌아가고 나셨어요. 그래서 내가 아우 다행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 말을 들었기에 내가 엄마한테 힘든 이런 이야기를 안 해줘도 되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었고요. 그다음에 친구들이나 교회에서한테는 말을 못 했어요. 얼마 동안은 왜냐면, 내가 이렇게 나눌 수 있는 마음이 내 스스로가 내 스스로 먼저 커밍아웃을 못한 거예요. 부모로서. 그래갖고 또 우리 언니가 두 분이 계셔요. 두 분이 계신데, 인제 그분들한테는 얘기를 해야
되겠다. 그래갖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이제 나한테는 9명의 조카가 있어요. 아니 8명의 조카가 있어요. 우리 아이들 빼고. 그래서 조카들한테도 만날 때마다 이제 이야기했는데. 어떤 조카는 이미 알고 있었고, 또 어떤 조카는 뭐 좀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래요. 그다음에 언니들한테 했을 때 뭐 한 분은 뭐, 뭐 그래도 내 조칸데. 한 언니는 뭐 저기 이제 성경 얘기하면서 이제 받아들이지 못한 분도 있고 그래요. 그런데 처음에는 만나서, 특히 외국 분한테는 얼마든지 내가 오픈을 하게 되더라구요. 한국분들한테는 오픈을 못 하겠더라구요. 그래갖고 이분이 내가 이렇게 보면은 가만있어, 말해도 될까 말까 말해도 될까 말까? 이러다가 말한 분도 있고 안 한 분도 있고. 근데 내가 어느 날 굉장히 비겁하게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저는 우리 아들이 멋지고 정말 정말 건실하고, 너무나 잘하고 있는 아이고 행복한 아이인데 나는 왜 남한테 성소수자라는 이유 하나로 부끄러워 해야 되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면서, 내가 잘못하고있다고 알게 됐어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다음부터 얘기를 했지요 교회에서나 이제 친하게 지내시는 분들한테는 제가 내 아들이 커밍아웃을 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근데 이제 어떤 분들은 듣고, 아무 말도 안 하시는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또 토닥거려주는 괜찮다고 그 아이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얘기를 해주시는 분도 있고. 어떤 분들은 어쩌다가? 이런 그러는 분도 있었고, 여러 가지 다 달랐어요. 근데 사실은 나중에는 어떤 생각이나냐면, 상관이 없어요. 그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떻게 하든.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은 내 아들과 주위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각들이에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상관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갖고 그때부터 찾았어요. 같은 입장을 가진 부모를 만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지요.
그래서 언제부터 PFLAG에 가입하고 결심을 했잖아요. 그거에 대해 더 얘기해 주실수있나요?
PFLAG에 대해서 솔직히 누가 PFLAG라고 얘기했을 때 PFLAG가 뭐예요? 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패런스 앤 프렌즈 업 레즈비언 엔 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PFLAG에 내가 알고 서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거는 얼마 안 됐어요. 그 지난번에 한국에서 온 너에게 가는 길이라는 다큐먼트 영화가 있었어요. 영화에 이제 우리 식구 모두가 갔을 때. 그때 PFLAG에 활동하시는 학부형님도 많이 부모님도 만나게 돼서 같이 조인을 하게 됐고 많은 정보를 받았어요. 그래서 PFLAG에 가면, 그래서 우리가 모임을 가지면. 한 가지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잖아요. 모든 경험이라든가. 각자의 또 다른 체험들을 갖다가 이렇게 하면서. 솔직히 마이 온 패밀리에서도 나를 억셉하지 못하는, 우리를 억셉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지만. PFLAG에서는 진짜 패밀리를 느껴요. 가족 같은 기분/ 내가 여기서는 진짜 나를 이해해주고 나를 받아주겠구나. 또 우리 아들이 여기 오면 참 편하겠구나. 그래서 굉장히 제가 PFLAG를 만난 것이 굉장히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PFLAG사람들과 같은 공통점이 있나요?
PFLAG분들도 같은 이유죠. 우리가 만난 게. 그리고 지금 우리가 PFLAG에서 굉장히 많이, 나 역시 내가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일라이가 처음에 커밍아웃을 했을 때 내가 이런 책을 좀 알고 싶어서 한인 서점에 갔을 때 진짜 한 권도 제가 발견을 못 했어요. 거기에 동성애자에 대한 책이 한 권도 없더라구요. 책방에. 한인 책방에. 그래서 이제 어쩌다가 우연하게 알게 돼서 신문에 난 책을 읽어서, 굉장히 많이 배웠거든요. 그와 마찬가지로 PFLAG에서 서로 나누는 것이 정말 좋은 에듀케이션. 정말 부모로서 자녀를 이해하는데, 와
잘못된 게 아니구나, 다른 것 뿐이구나. 이런 이야기들. 그래서 굉장히 여직, 지금까지의 경험은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기다려지고 그분들을 만나는 시간들이. 또 한편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아졌구나. 나도 이제 성소수자 운동가가 돼야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많은 액티비스트를 만나요.
그 단체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어려운 점이 있으셨나요?
어떤 게 있냐면요. 우리가 모여도 저희가 이렇게 밖에 사인 같은 거 잘 안 해놔요. 왜냐면은 엔티가 있잖아요. 그래서 어느 또 실질적인 저기 사건도 있었죠. 총격 사건도 있었고, 어떤 게이바에서나 저기 있는 총격 사건도 있었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어렵다고 해야 될까요? 그다음에 인제 뭐 사진을 찍어도, 사진 찍길 원하시는 분들만 이케 사진 내가 내 얼굴이 성소수자의 대해서 내가 이렇게 나올 수 있어도 괜찮다는 그런 분들만 찍고.
코리아타운에서, 어떤 경험/시련을 견디셨나요?
네 코리아타운의 성소수자. 솔직히 코리아타운은 아마 제가 제일 활동할 때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아직도 이렇게 낙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정말 놀라게 KYCC에서 이런 워크샵이 있다고 그래서, 제가 한번 참여를 했었고 또 이런 스토리를 공유하게 해준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게 와우 내가 많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한인타운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지금 제가 비전이 달라졌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이제는 뭐 레인보우 뱄지나, 또 뭐 레인보우 팔찌 이렇게 하고도 내가 가서 편안하게 한국 음식점 가서 밥을 먹을 수 있고 마켓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도움을 많이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도움을 준 사람이요. 저희 어머님이죠. 뭐 물론 모든 어머님들이 다 도와주고 자식들을 그러지만 저희 어머님이 늘 하는 얘기가 있으셨어요. 장례식은 꼭 가라. 생일 집은 안 가도 되지만, 하는 말씀을 하셨고. 또 어머님이 늘 이렇게 가르쳐줬든 라이프 나의 이 라이프 스타일이나 내 인생 철학이나 이런 것들은 다 저희 어머님으로부터한테 제가 배웠어요.
자녀분들에 어떤면이 가장 좋으세요?
우리 자녀는. 이제 우리 딸 라나는 굉장히 책임감이 강해요. 그리고 우리 라나는 굉장히 순수해요. 순수하고 솔직히 저는 딸과 아들아이가 모든면이 좋아요. 어떻게 나의 딸과 아들이 됐을까? 또 뭐 부모로부터 많이들 이게 배우잖아요. 내가 우리 엄마한테 배운 것처럼. 그런데
저는 사실 가르쳐 줄 수 준 게 너무 없는데, 애들 한테 갖고 있는 모든 거를 좋아하는데. 제일 좋아하는 거는 두 아이가 다 순수하다는 것. 정말로 그게 참 좋아요.
자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거를 하는 것보다, 그냥 내가 있는 내 그대로. 이것이 나인데 이것이 나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유. 또 내가 남을 봤을 때 그게 그 분이에요. 그사람이야 그쵸? 어떤 저기 관념이나 또 뭐 이래야 된다는 제약이나 이런 거 없이, 순수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그대가 그대인 이것이 참 자유 아닐까요? 내가 아까 자녀에 대해서 얘기한 것 중의 하나만 더해도 될까요? 내가 아까 모든 걸 다 좋아한다고 그랬잖아요. 저희는 셋이 똑같은 타투를 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타투를 할때, 하자고 했을때, 와 내 나이에 무슨 타투야? 내가 그랬거든요. 그리고 타투는 저기 뭐야? 성경에도 저기 하지 말라 그랬어. 그랬더니, 엄마도 타투 했잖아요. 눈썹이랑. 그래갖고 내가 그때는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타투를 셋이 똑같은 타투를 하자고 그러는데. 정말로 밤새껏 고민했어요. 잠을 못 자고 과연 해야 될까 안 해야 될까를. 근데 타투한 게 진짜 지금 너무너무 우리가 똑같은 타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꿈을 향해서 쏘자 해갖고, 세 명 나, 라나, 일라이, 세 명의 화살을 이렇게 디자인을 해 갖고 저희가 똑같이 타투를 했어요. 그만큼 저는 우리 아이들을 좋아해요.
지금 가장 큰 걱정은 무엇인가요?
지금 가장 걱정은 역시 세상에서 다르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그렇게 이제 LGBTQ의 길을 가는. 저희 또 우리 아들 일라이가 가장 늘 마음의 생각이 걱정이 되고. 나는 아이가 정말로 차별 없는 사회에서 자기가 우리와 똑같이, 똑같은 정말 사회 환경이나 똑같은 행복을 느끼고 살아가길 바래요.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도 어느 LGBQT 사람들에게한테 대해서 잘못 알아갖고 이렇게 차별을 준다든가 또 모욕을 준다든가 뭐 그런 일은 못 참을 것 같아요.
저희에게 무슨 질문을 받고싶나요?
우리 애들 이야기를 물어보는 질문이나. 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질문과 내가 제일 할 수 있는 이야기, 거기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네요… 누군가로부터의 성소수자에 대한 질문을 할 때가 제일 할 말이 많고 잘 대답해줘요.
만약 과거에 나에게 조언을 할 수 있다면?
더 용기를 가질걸 더 용기를 갖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걸 그런 생각이 드네요…
지금 자라고 있는 청소년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만약에 이미 커밍아웃을 했다면, 찾으세요. 여러분을 이해할 수 있는 이해해줄 수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찾으세요. 그리고 함께 하세요. 또 아직 만약에 커밍아웃을 할 수 못하고 계신 분이라면, 먼저는 그 나의 정체성을 알려주세요. 커밍아웃을 먼저 하세요. 그러니까는 알아요, 많이 두렵고… 가장 안타까운 일은, 우리 아들도 내가 그렇게 다 이해한다고, 엄마는 나랑 참가깝다고 얘기해도 나한테 가장 나중에 커밍아웃을 했어요. 그리고 사람이었어. 또 자라면서 굉장히 자신의 자신이 굉장히 힘들어 했어요. 그를 내가 몰랐던 것 뿐이거든. 근데 참 안타까운 일은 만약에 아직 커밍아웃을 했던, 할려고 아직 못했든 간에, 그 가족으로부터 외면을 당한다든가 버림을 받는대든가… 그런 어린 친구들 생각하면 정말로 정말 내 마음이 힘들어요. 어떻게 해줘야 될까? 근데 용기를 가지세요. 그리고 세상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요! 내가 좋은 분께는 좋다,나쁘다가 아니라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깐 두드리세요. 찾으세요.
청소년들에게 궁금한게 있나요?
미안해요. 솔직히 그렇게 생각을 못 했네. 나는 궁금하다는 것보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응 친구 좋죠. 친구가 우리 청소년때에는 정말 친구만큼 중요하고 친구만큼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나를 행복하고 정말 신나게 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친구들만큼. 근데 친구들을, 친구들과의 관계가 내가 친구를 한테 어떤 영향을 주며 어떻게 리드할 수 있는가. 사회에 리더십을 좀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배워야 될 리더십, 그리고 시간도 투자하고, 이런 열정도 투자하고 해서 좋은 리더가 되시길 바랍니다. 갖기를 바랍니다.
코리아타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문제는 알지 못한다는거야. 진정으로 무엇이 동성애자인지를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문제는 저희가 정말 에듀케이션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알려야 돼.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프라우드한게 무엇인가요?
암 네 저는 저한테 가장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프라우드해요. 나는 저를 참 많이 사랑해요. 그런데 솔직히 요. 모든 일이 가장 큰 파워는 내가 이게 살다가 남한테 나를 알려야 되잖아요? 어필해야 되잖아요? 그죠? 그럴 때 가장 큰 힘은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모든 거를 다 그냥 감출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다 사랑하고 다 좋았어 거든요. 그리고 모든 제
이야기지만 라이프가 좀 이렇게 힘들었죠. 왜냐하면, 세 분을 결혼했어요. 첫 번째는 이혼을 했고 애들 남편이 이혼을 원했고 두 번째는 또 결혼했더니, 또 이제 아파서 제가 과부가 됐고… 세 번째도 또 이혼을 하고 지금은 내 라이프가 이렇게 오면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때마다 최선을 다했어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내가 생각한 이유는 내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가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늘 항상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친구 하나가 있으면 참 좋겠다. 항상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게 나르시즘인가? 그것이..? (웃음)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네, 한가지만 더 얘기할까요? 네, 나한테는 딸이준, 네 살짜리 손자가 있어요. 그 손자가 네 살인데. 그아이 엄마 아빠 딸과는 절대로 아이한테 성별에 대해서 가르치질 않아요. 니가 남자다 여자다. 뭐 니가 이래서 니가 뭐 남자기 때문에 블루다. 뭐 이런 거를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아이한테 너 저기 보이니 물어보면 눈을 말끔히 쳐다보고 가만히 있다가 아니 나는 오스카야. 걔 이름이 오스카 거든요. 그럼 아니, 나는 왜 저렇게 내 아이들을 못 키웠을까? 참,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별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해 보지 않을까? 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