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ELLE PARK

Michelle Park was born in Osaka, Japan, in 1940. As a Korean-Japanese woman, Michelle learned Korean after she emigrated to Hawaii in 1974. Being fluent in Japanese, one of her earliest jobs in America was at the airport in Hawaii. She asked to be transferred to Los Angeles to be closer to family and saw Koreatown grow from its earliest days, when there was only one Korean market, to the thriving neighborhood it is today. She lives in Wilshire Towers, an older adult residence in Koreatown.

어디를 가든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안심이 되고 좋더라고요

Interview by Lucy Hwang

코리아타운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미국에 온 지 꽤 오래됐는데… 이민 초기에는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없었어요. 근데 요즘은 꼭 한국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한국은 여러차례 전쟁을 경험하면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저희 세대 사람들의 경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미국에 오니 정말 환경이 많이 달랐어요.

저는 실제 태어난 곳은 일본이에요. 일본이 고향이기 때문에 가정 교육이나 생활 습관은 일본 스타일이 많이 있어요. 예전 한국의 경우 일반 사람들이 교육을 받을 기회가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지금은 옛날 같지 않고 한국이 많이 발전돼 너무 좋습니다.

한국어를 어떻게 배우셨나요?

한국어는 미국에 와서 배웠어요. 일본에서는 한국어가 꽤 잘 알려져 있어요. 저는 새로운 언어에 대해 상당히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아야어여”(한국 알파벳)를 사용하지만 일본어는 자음과 모음 등 발음 수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요. 그래서 “커피” 같은 단어나 혀를 굴려야 하는 단어 발음은 어렵죠. 많은 사람들이 ‘미셸은 한국말을 참 잘한다’고 그러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샀어요. 한국어는 정말 배우기 어렵지만, 한국어를 잘하면 다른 언어들도 쉽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코리아타운에 처음 왔을 때와 지금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얘기해 주세요.

너무 달라졌죠. 이민 초기에는 코리아타운 내 한국 마켓이 놀만디와 올림픽가 근처 올림픽 블러버드에 딱 한 곳 있었어요. 당시 한국마켓은 김스전기에서 길 건너면 다음 블럭에 있었어요. 지금은 한국 마켓이 많이 생겨 참 좋습니다.

코리아타운은 어떻게 해야 발전할 수 있을까요?

한국 사람들은 예전부터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일도 잘하고 최선을 다하는 근성이 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도 갖추고, 에티켓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한국 사람들은 남이 상처를 받든 말든 자기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경우 상대방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잘 안 하더라고요. 흑인을 비롯해 미국 사람들 대부분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잘 갖추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매너를 배운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코리아타운에서 생활하면서 제일 좋았던 기억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제가 영어를 잘 못하는데 한인타운에서는 이웃들의 따뜻함과 배려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인타운에는 어린 학생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고, 이런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지내는 것이 참 좋아요.

영어는 어떻게 배우셨어요?

저에게 영어 발음은 참 어려웠어요. 대부분의 영어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배우게 됐습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교를 등록하려고 했는데, 먹고사는 게 어려워 결국 학교를 가지 못했어요. 이민 초기에는 대부분 이력서를 내지 않아도 일을 쉽게 구할 수 있었어요. 어디를 가든지 구직자보다 일할 수 있는 직원들을 찾는 회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자리를 잡는게 쉬웠어요. 제가 가장 오래 근무한 곳은 공항이에요. 공항에서 15년 동안 근무했고, AT&T 통신사에서 또 15년간 일했어요.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게 됐어요.

코리아타운에 제일 좋아하는 장소가 어디인가요?

크렌셔부터 버몬트 사이 윌셔 블러버드가 제일 좋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요. 제 직장도 거기 근처 있었어요. 주변이 많이 시끄러웠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복잡하고 번잡스러운게 외로움에 많은 도움이 되는거 같아요. 차도 많고 사람들도 많이 걸어 다니고, 그리고 빌딩과 마켓도 많아 좀 번화한 지역에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아 참 좋은거 같아요.

언제 미국에 이민 오셨어요?

1974년도 9월 21일에 왔습니다.

미국에 어떻게 이민을 오게 됐나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직장 생활을 했었는데 친한 언니를 통해 미국 지사에 근무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 언니는 미국산 물건은 좋고 영어도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이야기 했어요. 언니는 계속 나한테 미국에 갈 생각이 없냐고 물어 보면서 관심이 있으면 자기 상사한테 이야기 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미국에 가는 것에 대해 가족들이랑 상의했는데 혼자 외국에서 사는게 힘들고 외로울 거라고 반대했어요. 근데 그 언니가 미국에 같이 가면 자기가 보살펴 줄테니 걱정말라고 했고 결국, 언니를 믿고 미국에 갈 결심을 하게 됐어요.

제가 미국에 올때는KAL[대한항공]이 없었어요… 대한항공은1975년도부터 운행했는데 제가1974년도에 미국에 왔으니까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당시 한국과 미국을 오고 갈때 아메리칸 에어라인을 탄 것 같아요. 제가 올 당시에는 공항이 지금처럼 그렇게 크지도 않고 아주 좁았어요. 지금은 비행기를 타는 일이 참 편하고 간편한데 당시에는 번거롭게 오래 걸렸어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탑승구 앞에서 길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했고, 버스 탑승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수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어요. 또 한국에서 미국으로 바로 가는 직항이 없어서 일본을 경유해 가야 하고 경유지에도 오랜 시간 기다렸던 기억이 나네요. 일본에서도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 하와이에서 기름을 넣어야 해서 미국 땅을 처음 밟게 된 곳은 하와이였어요. 당시 하와이에서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니 영주권을 줬던 기억이 납니다.

식료품 구입 지원금, 연금, 메디칼 등 노인을 위한 혜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나 감사한 거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소셜 연금을 타고 있거든요. 제가 일하는 직장마다 좋은 매니저를 만나서 그분들한테 많은 조언을 받았어요. 그분들이 하라는 대로 다 했어요. 아프거나 필요한 것이 있는 경우 전부 다 정부 혜택을 받을 수 있어 너무나도 감사한 거 같아요.

한국의 공공혜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한국을 떠난지 꽤 오래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공공혜택이 많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한국에 노인들이 살기 아주 좋다고 해서 한번 가볼까 생각을 해보긴 했어요.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셨어요?

이민을 고려했을 당시 사실은 미국이 아닌 일본에 가려고 한 거에요. 해방 후에 한국 정부와 미군정청이 일본에 못 들어가게 했어요. 나중에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도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했어요. 제2차 세계 전쟁 발발 당시 우리가족은 한국으로 피난을 갔어요. 이후 한 6개월인가 7개월 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됐어요. 전쟁 후 미군이 한국 내 주둔한 일본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민간인들의 일본 입국은 금지했어요. 결국 우리 가족은 전쟁을 겪으면서 여성들만 한국에 피난을 오고 남자들은 일본에 남으면서 이산가족이 됐어요. 이러한 전쟁을 겪으면서 30년 만에 일본을 방문해 친오빠와 재회하게 됐어요. 이 사실을 잊고 있었네요.

일본에서 산 경험 덕분에 하와이 공항에서 일하게 됐어요. 미국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싼 적이 많았어요. 너무 외롭고 힘들어하니깐 매니저가 공항 한 구석에 잠시 앉아 쉬라고 했어요. 제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떤 미국 남자가‘당신 항상 이 시간 되면 여기 나와 있죠?’라고 물어봤어요. 그 사람은 아마 내가 일본사람인 줄 알았나봐요. 지금도 저한테 일본 사람의 느낌이 많이 풍기나 봐요. 그래서 그 사람이 내가 일본 사람인 줄 알고 혹시 공항에서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 보더라고요. 자리가 있으면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공항 면세점에 들어갔어요. 면세점에서 일을 했는데 워낙 물건을 잘 파니까 회사 신문에 나오기도 했어요. 면세점에서 일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와중에 다른 식구들도 미국에 이민을 오게 돼 결국 L.A.로 직장을 옮기게 됐어요.

하와이랑 L.A.에 살아 보셨는데 어떤 곳이 더 좋은 거 같아요?

하와이에 살 때는 많이 외로웠어요. 하와이는 관광객이 많아요. 관광객이 혼자 오는 분들이 별로 없고 대부분 커플들이 와요. 근데 하와이는 큰 나무들도 여자 남자처럼 쌍을 이루며 ‘커플’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항상 날씨가 따뜻한 봄 같아요. 그래서 너무 좋죠. 항상 관광객들이 다 부부동반해서 오니깐 외로움이 더 컸어요.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어떻게 보살피셨어요?

아버지는 13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갔었대요. 그리고 유학 도중 아빠와 엄마가 만나 결혼을 했다고 들었어요.

부모님들을 어떻게 보살피셨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우리 엄마랑 아빠는 한국에서 돌아가셨어요. 예전에는 환갑을 넘겨 사는게 참 힘들었던 것 같아요. 환갑을 넘기고 살아 있으며 너무 잘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니 아버지는 다행히 환갑 다 지내신 후 돌아가셨어요.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는 법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 한국에서 살 때 아버지가 한국분인데 일본에서 왔다고 일본사람이라고 너무 차별을 받은 기억이 나네요. 일본이 공습을 받자, 정부에서는 계속 대피하라고 했어요. 전쟁이 났을 때 정부에서 계속 피신하라고 했어요. 생각 해보면 미국은 참 신사의 나라인 것 같아요.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미사일을 언제 어디에다 발사할 것인지 미리 알려주었고, 일본이 항복하고 전쟁을 끝날 수 있는 기회를 줬어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피신하라고만 했어요. 아버지는 한국분이라 50명이나 되는 모든 친인척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어요. 아버지는 그때 잠시 한국으로 피난을 가는 거지 살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1942년도에 일본이 하와이를 공습했잖아요. 그때 미국정부가 일본계 미국인들을 캘리포니아 등 여러 캠프 수용소에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내용은 잘 모르겠네요. 근데 하와이 전체 인구의 70%가 일본 사람들이에요. 하와이에서 시민권을 받았는데 그때 판사가 일본말로 나한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어렸을 때 생각한대로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어렸을 때 판사나 검사가 되고 싶었어요. 법대에 다니는 사촌과 함께 법 공부를 했는데 시험을 한번 본 뒤 서울대에 입학하기에 실력이 한참 모자른다고 깨달았어요. 그런데 서울대 말고 고려대 법대도 좋은 학교라고 들어서, 결국 고대 법대에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결국 방송국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한 방송국 노래자랑대회에 참가한 뒤 자연스럽게 예능쪽 일을 했어요. 학교생활과 방송국 일 양쪽을 병행하기가 너무 어려워 결국 학교를 포기하게 됐어요. 미국으로 온 뒤 중도에 포기한 학교 공부를 다시 시작했는데,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결국 일하는 것에 제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코리아타운에 살면서 좋은 점, 나쁜 점 힘든 점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일만 하다 보니 직장 내 동료들을 제외하고는 친구가 많이 없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직장 내 한국인들과 교류하는 것이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느꼈고, 마치 한국으로 돌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L.A. 이주해 처음으로 한국 마켓을 방문했을 때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여성분에게 말을 걸고 싶더라고요. 그 여성분에게 한국사람인지 물어봤는데 알고 보니 중국사람이었어요. 외국에서 한국 동포를 만나는 느낌은 정말 특별하고 소중해요. 지금은 한국 분들이 많이 한인타운으로 오시는데 너무 든든합니다. 어디를 가든 한국 사람이 있으면 심적으로 편안해져요.

우리가 살면서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미국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친절이에요. 제가 나이가 드니 이런 점을 더 중시하게 되는거 같아요. 제가 무거운 것을 들고 버스를 타면 자리를 양보해 주는 친절함을 베풀어 주더라고요.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한국 사람들을 만나는데, 이러한 친절함과 에티켓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발생한 동양인에 대한 증오범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전에 신문에서 보니, 증오범죄 피해를 많이 당하는것 같더라고요.

코로나 기간에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코로나 때 주로 집에 있었어요. 저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 이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질병을 통해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사실이 좀 무섭고 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좀 진정됐습니다. 7살부터 일본에서 살면서 교회를 다녔는데 지금까지 쭉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기독교 신자인데다 하나님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거짓말이나 남을 무시하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