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에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Interview by Cheyenne kim
어디에서 태어나셨고 언제 미국으로 이민 오셨나요?
한국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1975년에 캔자스로 이민을 왔어요. 그런데 친구가 아파트를 LA에 얻어줘서 한인타운에 1976년부터 살게된 거죠. 한인타운에서 일하다가 이제는 은퇴했죠.
이민을 오게 된 계기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말씀해 줄 수 있나요?
1975년에 캔자스로 이민 와서 혼자 지냈어요. 한국에서 결혼한 우리 와이프 언니인 처형이 국제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처형의 초청으로 이민을 오게 됐고요.
처형이 준 주소만 가지고 캔자스로 온 거야. 그 주소가 허허벌판에 있던 트레일러(이동식 주택)였어요. 당시 처형의 남편이 군인이라서 그런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군인인 거야 … 그 동네에는 뭐 한국 사람도 없고, 일자리도 변변치 않고, 말도 안 통하지. 도저히 못 살겠다 싶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고, 결국 한국에 가기 위해 경유지인 LA로 갔어요. 당시에는 뉴욕에도 한국으로 가는 항공편이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LA로 경유하러 왔죠. 출국 당일 아침에 호텔 근처 구경이나 하려고 산책을 나갔는데 우연히 오래된 친구 한 명과 마주친 거야. 반갑게 악수하고 난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LA에 잠시 들렸다고 하니까 그 친구가 나보고 미쳤다고 하더라고 돈 써가며 왜 다시 한국에 돌아가려고 하냐고, 왜냐하면 자기는 돈을 들여서 미국으로 왔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 친구가 아파트를 구해줘서 1975년도에 LA에 정착하게 됐어.
가족이랑 함께 미국에 이민 오셨나요?
처음엔 캔자스로 혼자 왔다가, 1976년에 LA에 아파트를 구하고 나서 한국에 있는 와이프와 애들 셋을 데리고 왔어요. 애들 셋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고 큰애가 5살, 둘째 아이가 4 살, 막내딸이 1 살 때였어요. 아주 어릴 때 와서 우리 부부가 고생을 많이 했지요.
저희 부부가 하루 종일 일을 하다 보니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낼 때 목에 아파트 열쇠를 걸어줬어요. 아이들이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저희가 일 끝나고 돌아올 때까지 집에서 아이들끼리만 있었는데 그러다가 경찰에 걸릴까 봐 걱정도 하고 고생 정말 많이 했어요. 그리고 친구가 구해준 아파트에서는 애들 때문에 쫓겨났어요. 그래서 다시 아파트를 찾을 때, 어린애들을 받아주는지 확인을 하고 찾았지요. 8가와 호바트에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라 깨끗하지 않고 좀 지저분했어요. 그래도 이젠 애들이 다 커서 모두 나이가 50이 넘었네요.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담은 영화 ‘미나리’를 보셨나요?
봤지요. 내 이민사가 미나리 내용과 비슷해요. 근데 미나리는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도 미나리를 보면서 처음에 이민 왔을 때 고생한 것이 생각이 나고, 그때 기억이 많이 떠오르더라고요.
미국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었나요?
살아남으려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그냥 돈 벌고 일하는 것 밖에 없었어요.
미국에 이민 와서 겪은 어려움들이 뭐가 있었나요?
이민 후 한 5년 정도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힘들었어요. 특히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굉장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형제들만 한국에 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덜해지더라고요. 그래도 한국에서 나고 자라 문화와 언어가 편하다 보니 여전히 한국이라는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한국에 사는 게 장단점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가더라고요. 어릴 적 친구들도 이제는 할아버지가 됐잖아요. 한국을 떠난지 너무 오래됐고 모든 게 예전과 같지 않아요. 나이가 들수록 정말 많이 외로워지는 거 같아요.
지금 미국 시민권을 갖고 계세요?
아직까지 영주권자예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실 계획이세요? 아니면 그냥 영주권을 유지하실 건가요?
한 45-46년 미국에 살았어도 한국에 8남매가 있다 보니 아직까지 한국이 많이 그리워요. 나만 혼자 미국에 있고요. 이제 나이가 80이넘으니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냥 영주권자로 사는 거죠.
정말 열심히 사셨네요.
열심히 안 살면 안 되니까 최선을 다했죠. 지금은 이민 오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준비를 하고 오니깐 큰 고생은 안 하잖아요. 1970년대 만해도 여기서 영어도 모르고 현지 문화도 잘 몰라서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어요. 공장 다닐 때도 주로 젊은 한국 여자들이 화장실에서 막 울어요. 왜 우냐고 물어보면 본인도 한국에서 좋은 대학 나왔는데 미국에서는 원하는 직장을 못 찾고 식당 종업원 아니면 봉제 공장에서 고생하며 일하는 게 서러웠던 거죠. 고생은 했어도 그 당시 이민자들이 자리를 잘 잡고 자녀들을 잘 키워서, 자녀들도 여기에서 정치인, 의사, 공무원이 됐어요 ... 부모들이 희생한 덕분에 애들이 다 잘 된 거 같아요. 부모 세대가 정말 고생을 많이 한 거지요.
미국에 이민을 결정했을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한국에서 어렸을 적 가정 형편은 좋았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자택에 거주하면서 의류회사도 운영했어요.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에 제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그럭저럭 부족함 없이 잘 지냈어요.
코리아타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세요?
코리아타운이 좀 복잡하긴 해도 접근성이 좋아요. 특히 나이 든 사람들한테는 마켓도 병원도, 그리고 약국 같은 편의시설이 가까우니 좋죠. 1976년 코리아타운은 마켓도 없고 상점도 별로 없었는데, 그 후로 많이 발전했지요. 그때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고, 한인 은행도 한미은행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올림픽 마켓’이 유일한 마켓이었죠. 웨스턴가에도 한국 마켓이 있었는데 이제는 사라졌죠. 식당도 예전에 몇 군데 있었는데 이제는 다 없어졌어요. 한국 식당도 중국 식당도 별로 없었고요. 한인타운이 이제는 많이 발전해 음식 문화도 예전보다 다양해지고 많이 성장한 거 같아요. 그때는 짜장면뿐만 아니라 어떤 음식들도 전부다 엉터리였어요. 그래도 한국 음식이 그리우니까 당시에는 맛있게 먹었지요.
코리아타운에서 제일 좋은 곳은 어디인가요?
지금 사는 집이 좋지요. 노인 아파트에 살지 않고 개인 주택에서 거주하고 있어요.
차를 운전하고 다니세요 아니면 버스를 타고 다니세요?
한 1년 반 전에 운전면허증이 말소되고 지금은 버스 타고 다니죠. 제가 사는 곳이 한인타운 근처라 주로 걸어 다니고 조금 먼 곳으로 이동할 때만 버스를 타요.
미국에 와서 일한 경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직업은 무엇인가요?
미국에 와서 별의별 직업을 다 가져봤죠. 고생도 많이 했고요. 그러다 보니까 그때 나이가 30대였는데 이제 나이가 80이 됐네요. 내가 옷 가게와 봉제 공장에서 일했거든요. 그때가 제일 기억에 남죠. 그때 여성 의류를 팔았는데, 그때만 해도 점잖은 스타일의 의류가 인기가 많았어요. 한 7-8년 가게를 하는 과정에서 유행을 못 따라잡겠더라고요. 시대가 변하면서 새로운 패션이 제 기준하고는 다르게 변하더라고요. 트렌디한 옷만 팔리지 점잖은 스타일의 옷은 잘 안 팔렸어요. 당시 사업 운영 비용도 많이 증가했고 부동산 가치도 크게 올라갔어요. 결국 제가 운영하는 옷 가게는 문을 닫았지만 사업체 처분하는 과정에서 다행히 권리금은 많이 챙겼어요.
다운타운에서 옷 가게를 하셨던 당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주세요.
그때는 다운타운에 도매상은 별로 없었지만, 봉제 공장은 많았어요. 게다가 멕시코로 의류 수출도 잘 안됐고, LA 다운타운 근처에 스왑밋 (swap meet) 있잖아요? 그때는 스왑밋이 잘 돼야 옷도 잘 팔리는데 그 후로 몇 년 동안은 잘 됐었는데 스왑밋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결국 문을 닫았죠.
다운타운에서 어떻게 장사를 시작하게 됐나요?
이민을 오기 전에 바느질을 좀 배우면 미국에서 직장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해서 이민 오기 몇 달 전부터 한국에서 봉제 학원을 다녔어요. 그 경험 없었으면 미국 와서 일도 못 구했을 거예요. 당시 신문에서 봉제 공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구직 광고를 봤어요. 그래서 인터뷰를 봤는데 경험이 있냐고 물어봐서 바느질을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먹고 살아야 하다 보니 의류업계에 대해 알게 됐고 나중에 매니저도 하고 결국 직접 사업도 할 수 있었어요. 봉제 공장 주인이 유대인이었는데 원단 등 재료를 공급해 줄 테니까 팔아보라고 하더라고요. 자기 건물에 렌트를 줄 테니깐 시작해 보라고 해서 옷 장사를 하게 됐지요.
보통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아침에 나가 그 날 물량을 배달 받고, 일을 열심히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죠. 열심히 일한 만큼 돈을 벌기 때문에 굉장히 부지런히 일했지요.
다운타운에서 일했을 때 어떤 사람들과 일을 했어요?
한국 사람이 삼분의 일 정도 되고, 나머지는 남미 출신 근로자였어요. 한국 사람하고 남미 사람하고 하는 일이 별 차이는 없었어요. 마찬가지예요. 같은 분야에서 같이 근무했어요.
한국 사람들과 남미 사람들이 잘 지냈다고 생각하나요? 불편한 점도 있었나요?
그런 건 없고요. 남미 사람들이 굉장히 순진하고 착해요. 그래서 불편함도 없고 차별하는 일도 없었어요.
다운타운에서 일했을 때 만난 사람들과 아직도 만나요?
같이 일했던 분들 중에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일했던 시기가 한 20-30년이 되다 보니 이제는 없죠.
다운타운 업계 경험에 대해 후회한 적이 있어요?
전혀 없어요.
다운타운에서 일했던 시간을 즐겼나요?
그때는 30대라 별로 고생한지 몰랐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와 이제는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 20년 전까지도 일했습니다.
일하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에요?
무슨 일이든지 인내심이 있어야 해요. 모든 일에 인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 노동을 했는데 결국 인내심이 모든 것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봉사한 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주시겠어요?
재미 한인 노인회 회장을 2010년부터 7년 동안 두 차례 역임했어요. 7년 정도 봉사하다 그 다음에는 삼일 동지회 초대 회장을 맡았어요. 그리고 KAC에서 스티브 강 국장 때 이사회 멤버로 있었죠. 원래는 우리 둘째 아이가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어서 나도 선교에 꿈이 있었는데 나이가 너무 많아 외국으로 선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LA 한인타운에서라도 봉사활동을 하자고 마음을 먹고 관심을 가졌죠. 한인타운 올림픽가와 웨스턴 애비뉴에 노인들이 새벽부터 많이 돌아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아 … 내가 고향을 떠나온 한인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노인회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처음 회원가입을 해서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됐어요.
노인회는 어떤 일을 주로 하는 단체인가요?
노인들이 영어를 못하니까 전기세하고 수도세, 렌트 등 각종 공과금 납부하는 것을 잘 몰라요. 그래서 영어를 잘하는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해 요금 납부하는 것을 도와주고 나중에는 정부에서 지원도 받았어요.
노인회에서 회장님이 주로 하신 일은 무엇인가요?
회장을 연임했는데 임기가 한번 끝나면 재선까지만 가능하고 선출직입니다. 보통 회원이 7,000-8,000명 되는데 회원들이 결국 회장을 투표로 뽑는 거죠. 첫 번째 임기 때 인기가 많았어요. 그래서 두 번째 회장 선출 당시도 큰 문제 없이 뽑혔어요. 두 번째 임기 동안에 L.A. 에 지부를 개설한다는 삼일 동지회 연락을 받았어요. 그와 관련해 초대 회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 받고 4년간 동지회 회장도 맡았어요.
삼일 동지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한국에서 자란 사람들은 삼일절과 독립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미국에서 자라는 2세들은 잘 몰라요. 그래서 삼일 동지회에서는 2세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어와 역사에 대한 교육을 하는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올해 삼일 동지회에서는 어떤 사업을 하셨나요?
코로나 때문에 많은 행사들을 취소하고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글짓기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봉사활동 경력에 대해 더 나누고 싶은 말이 있나요?
삼일 동지회 회장으로 역임할 때 데이빗 류 라던지 한인 정치인 성장을 위한 자원봉사 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한인들이 선거에 나올때마다 가가호호 선거운동을 몇 년 도와줬어요. 또 마크 리들리 토마스 시의원 선거 출마 당시에도 선거운동을 많이 도왔어요.
외국으로 선교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 사는 지역에서 이웃들을 돕는 일도 참으로 값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저런 봉사를 이어왔고요. 사람마다 신앙은 달라 전도는 못하지만, 커뮤니티 봉사활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적인 충만을 베풀기 위해 노력했어요. 제가 지금껏 지역사회를 위해 노력해온 일에 대한 자부심과 목표에 대해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보람을 느꼈던 한 예로 노인회장으로 일할 때 굉장히 유명한 연예인이 노인회를 방문했어요. 자기 저서에 이민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제 도움으로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 참으로 뿌듯하더라고요.
봉사를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었나요? 하루에 4-5시간씩 외부에서 봉사하는 일이라 나이 때문에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올해까지 계속 선거 때문에 가가호호 캠페인을 했는데 힘들어도 앞으로 계속되는 선거도 도와주고 싶네요. 하지만 한인타운 아파트 내에서 선거 캠페인을 하는 과정에서 매니저 허락을 구하거나 가정집에 있는 강아지가 짖는 등 힘든 일들이 많네요. 그래도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는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는 말 좀 해주세요.
젊은 세대에게 특별히 전하고 싶은 교훈은 없어요. 어릴 때 이민을 온 젊은 세대들은 부모들이 고생한 사실을 아니까 엄청 겸손하고 검소해요. 하지만 문화적 차이로 인해 적응하는데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 가운데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 늙은 사람들하고는 달리 결단력하고 추진력이 대단하고요.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소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약속도 잘 안 지키고 남을 좀 이용하려는 단점이 있어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전혀 그런 게 없지만요.
우리가 한국어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깐 손자들도 다 영어와 한국어를 잘 해요. 우리 같은 늙은 사람들은 미국에 오래 살다 보니 외국사람과 얘기하는 건 대충 눈치채는 정도지요. 젊은 세대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결국 언어와 문화 다시 말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꼭 잊지 않고 배웠으면 해요. 그나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를 배우는데 참 좋은 거 같아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아시안들을 대상으로 하는 증오 범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단 자유롭게 밖에 돌아다닐 수 없다는 점이 힘들었어요. 예전에는 매일 운동하러 YMCA도 갔는데 그렇게 돌아다니지 못했어요. 너무 많은 시간을 집안에서만 보내니 외로움을 많이 느꼈어요. 다들 위험하다고 해서 밤에는 안 돌아다니고 많은 시간을 집에 있으니 우울해지는 거 같아요.
그럼 요즘은 주로 집에서 뭘 하세요?
한국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한국 신문도 읽어요. 또,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거나 카카오톡으로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있어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과 같은 공공보건의 위기를 경험한 적이 있어요?
아니요. 지금은 좀 특이한 시기인 것 같아요. 정부가 이렇게까지 통제했을 때가 있었나 싶네요. 하지만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상황에 부정적인 점도 많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팬데믹 이전에는 쓸데없이 나가서 사람들과 만나고 전화도 했지만 지금은 진짜 친한 몇몇 사람들과만 연락하니 편하기도 해요.
교회를 다니시나요?
동양선교교회를 다녔는데 대면 예배가 없어서 교회는 안 나가요. 하지만 집 근처에 200명 정도 사람들이 참석하는 교회를 가끔 나가요. KYCC 스티브 강 국장의 도움으로 백신 접종을 두 번다 잘 했습니다.